작은 호르몬이 뜨고있다. 그간 대부분 질병의 진단과 치료는 유전자나 단백질 연구를 통해 이뤄졌다. 하지만 최근 질병 현상을 ‘호르몬’으로 규명하려는 연구가 활발하다.

특히 분자량이 1000 이하인 호르몬들의 영역인 ‘대사체’ 분야는 인류에게 질병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대사체는 생체 대사의 결과로 나오는 산물 중 분자량이 작은 것을 말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이나 항체, 지방산, 아미노산 등이 바로 대사체의 일종이다.

그동안 학계에선 이 대사체를 이용한 질병 연구에 주목하지 않았다. 대사체가 정밀한 화학 분야에 속해 의학계나 생명과학계에서 접근이 쉽지 않았고 화학계 내부에서도 큰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엔 대사체 연구를 통해 호르몬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질병을 정복해보려는 시도가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호르몬과 질병의 관계를 밝혀라

대사체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질병은 호르몬의 변화에 의한, 또는 호르몬을 변화시키는 현상이다. 따라서 호르몬의 변화를 측정하면 어떤 질병에 걸렸는지, 걸릴 확률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호르몬을 조절한다면 상당수 질병을 고칠 가능성이 높다는게 이들의 생각이다.

중년 남성들이 주로 걸리는 전립선암의 경우 대표적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으로부터 생성되는 ‘DHT’가 암세포 증식을 촉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파나스테라이드로 DHT의 생성을 차단하면 상당기간 전립선 암의 진행을 막을 수 있다.

유방암도 마찬가지다. 유방암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환자의 30% 가량은 에스트로겐이라는 여성호르몬이 암세포의 증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고됐다. 이 경우 폐경기 여성이라면 티목시펜이라는 호르몬제로 여성호르몬을 억제하면 암의 증식이 더뎌진다. 또 폐경을 맞지 않은 여성은 난소에서 여성호르몬이 분비되는 것을 억제하는 억제제를 사용한다.

이밖에 우울증 역시 호르몬 질환의 하나로 분류된다. 인체는 자연치유기능이 있어 스트레스를 받게되면 우리몸이 스스로 코티졸 같은 호르몬을 분비해 스트레스를 해소하지만 이 호르몬의 분비 기능이 손상받을 경우 우울증에 걸리게 되는 것.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정봉철 박사는 “대부분의 질환이 호르몬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충분한 데이터가 축적된다면 호르몬 검사 만으로도 각종 질병을 진단 또는 예방할 수 있다”며 “최근 전세계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호르몬 연구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머리카락에 모든 정보가 있다

KIST 연구팀은 머리카락을 이용한 호르몬 검사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주목받았다.

정 박사는 “머리카락에는 다양한 대사체들이 있어 혈액검사보다 간편하게 호르몬의 분석이 가능하다”며 “또 머리카락이 자란 기간 만큼의 정보도 갖고 있어 과거의 몸 상태 까지 알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연구팀은 연구원 내 탈모 환자와 자녀들의 머리카락으로 탈모 관련 호르몬들을 규명했다. 심지어는 미래에 자녀가 탈모 증상을 보일 지 여부도 예측했다. 연구팀은 이 연구에서 기존에 알려진 DHT 외에 에피테스토스테론이라는 탈모 원인도 새로 찾아냈으며 이를 학술지에 발표해 주목받기도 했다.

연구팀 최만호 박사는 “머리카락 검사는 호르몬 외에도 콜레스테롤 검사 등에서 유용한 결과를 얻었다”며 “정상인과 환자들의 머리카락에서 얻은 대사체 정보들을 프로파일링 기법을 통해 분석하면 탈모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대사체학은 전세계적으로 발전 초기단계에 있지만 최근 MIT에서 21세기 유망기술로 선정할 만큼 중요한 분야”라며 “KIST 연구팀은 지난 20년간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스테로이드 호르몬 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에 있다”고 덧붙였다.

■규칙을 찾으면 치료법이 보인다

이같은 대사체 연구의 한 방법으로 최근 각광받는 것이 ‘프로파일링’ 기법이다. 프로파일링 기법은 여러가지 화합물들을 동시에 분석해 대사체들의 경향을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들어 정상인들과 갑상선질환 환자들의 혈액이나 머리카락에서 추출한 대사체 정보들을 나열하고 비교해보면 갑상선질환 환자들은 특정 호르몬들의 농도가 정상인과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어떤 호르몬이 어떤 질병과 연관이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이런 정보들을 모두 모아 데이터베이스화 하면 각 질병에 따른 호르몬 변화가 정리되고, 이 자료를 바탕으로 호르몬 검사를 통해 질병의 진단 또는 예측이 가능해진다. 또 질병과 관계가 있는 호르몬을 치료제 개발에 적용해 볼 수도 있다.

정 박사는 “아직 호르몬과의 상관관계가 잘 알려진 질병이 많지 않은 만큼 앞으로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분야”라며 “대사체학이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분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