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 말까지 내국인 1천3백50명이 HIV에 감염됐고, 그중 3백2명이 사망했다. 1980년대 주요 감염경로는 외국인이었다. 특히 외국인과 동성애로 감염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992년을 기점으로 내국인간 감염률이 외국인을 통한 감염률을 앞지르기 시작했고, 감염자의 연령도 다양해졌다. 처음엔 감염자 대부분이 20·30대 이었지만, 지금은 10대 청소년에서 40대 주부, 60대 노인까지 모든 연령층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 주로 매춘과 동성애로 에이즈가 전파되던 과거에 비해 지금은 ‘원조교제’, ‘인터넷에서 상대를 찾는 ’번개섹스‘, 해외관광, 노인매춘 등 다양한 경로로 퍼져 나간다. 공식적인 정부 통계는 없지만 에이즈 예방단체에 따르면 부부 감염자도 60쌍이 넘는다. 올해 초엔 마약 주사기 공유로 감염된 사람도 최초로 보고됐다. 감염자 증가율도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최초 감염자가 발견된 1985년부터 5백명에 이르기까지는 12년이 걸렸지만, 5백명이 더 늘어나 감염자가 1천명에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2년에 불과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년여만에 감염자는 무려 3백여명이 더 늘어났다.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의 설문조사결과에 따르면 항상 콘돔을 사용한다는 사람의 비율은 7.3%에 불과한 반면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람은 45.4%에 이른다. 성경험 연령저하로 청소년 에이즈 감염도 늘기 시작했다. 정식허가를 받은 유흥업소는 보건소에서 등록, 관리를 해 그나마 즉각적인 감염자 파악이 가능하지만 단란주점·출장마사지 같은 곳은 관리가 불가능해 매우 위험하다.
한국 에이즈 발생 15년 : 1985년 11월 한국인 최초의 에이즈 감염자가 발생한지 15년 4개월이 지난 2001년 3월 말까지 모두 1천 3백 50명이 HIV에 감염됐다. HIV 감염자 수는 해마다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제 에이즈는 수입질병에서 토착질병이 됐다고 할 수 있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1995년 이후 수혈이나 혈액제제를 통해 에이즈에 감염된 사례는 아직 없다. 1987년 이후 모든 헌혈액의 HIV검사 의무화로 이 부분은 어느 정도 해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안심은 이르다. 현재 보건소에서 실시중인 HIV 테스트는 바이러스를 직접 검사하는 것이 아니라 체내에 생긴 항체를 검사하며 정확한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항체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항체 생성 이전 기간을 ‘윈도피리어드’(window period)라고 하는데 평균 12주지만 사람에 따라 몇 달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이 기간 중에는 HIV에 감염됐더라도 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나온다. 따라서 감염을 의심하는 사람이 보건소를 찾는 대신 헌혈을 통해 에이즈 감염을 확인하려는 시도는 매우 위험하다. 윈도 피리어드에도 바이러스를 검출할 수 있는 PCR 검사법이 있지만 검사비용이 혈액 가격의 10배에 이르러 모든 혈액을 대상으로 한 검사가 불가능하다.
국내 HIV 감염자 수는 통계상의 1천 3백 50명은 정부에 등록된 감염자 수에 지나지 않는다. HIV가 몸에 들어오면 평균 10년 간은 무증상기여서 대다수는 감염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대한에이즈예방협회는 미확인 감염자 수가 6천∼1만 3천명 이상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물론 HIV 양성판정이 곧 사형선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HIV가 인체에 들어간 후 본격적으로 면역계를 파괴하기까지는 평균 10년이 걸린다.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의사는 환자가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989년 국내에 도입된 최초의 치료제 AZT도 약효는 기대 이하였다. 그러나 1997년부터 3가지 이상의 약물을 함께 복용하는 ‘칵테일 요법’의 도입으로 희망이 생겼다. 이 치료를 받으면 HIV가 거의 증가하지 않는다. 장기적 효과는 아직 미지수지만 오랜 기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약값이 적게는 매달 40∼60만원, 많게는 1백만원까지 들어간다. 하지만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감염자 치료비용을 전액 정부 예산에서 지원해 신청만 하면 누구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직 건강에 문제는 없더라도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감염자도 많다. 지금까지 감염자 중 3백 2명이 사망했으나 이중 약 3분의 1인 93명의 사인은 에이즈가 아니다. 상당수가 자살을 택했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두는 감염자도 많다. 아직 강제 해고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감염사실을 주위 사람들이 모르더라도 정작 본인은 견딜 수 없어 이직을 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염 수에는 피곤을 쉽게 느껴 육체노동을 하는 빈곤층일수록 직장 포기 비율이 높다. 당연히 병고에 생활고까지 겹치게 된다. 그러나 감염자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가족의 냉대다.
한편 실제론 HIV에 감염되지 않았는데 두려움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에이즈 포비아’로 불리는 ‘감염의심증’ 환자들로 그 수는 실제 감염자보다 더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개는 위험 행위 이후 검사가능 시점 전인 12주간의 기간중 극심한 불안에 시달린다. 그러나 이보다 고민이 더 오래가는 사람들도 있다.
효과적인 에이즈 대책은 과연 무엇일까? 더러는 감염자를 24시간 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1980년대 당시 보건소 직원들은 감염자를 늘 따라다녔다. 그러나 이 같은 방법은 인권침해에 해당하며 현실성도 크게 떨어진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이 HIV 검사를 기피하고 감염자도 지하로 숨기 때문이다. 정부가 감염자는 파악하되 격리·감시보다 치료를 돕는 쪽으로 정책이 전환한 것도 그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에이즈 감염경로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에이즈에 대한 인식도 매우 낮다. 따라서 에이즈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홍보·교육뿐일지 모른다.